검투사의 부활이다. 지프 글래디에이터가 한국 판매에 나섰다. 지프라면 믿고 지르는 마니아들은 살아 있었다. 올해 국내 할당량 300대가 2주 만에 완판됐음이 이를 말해준다. 어지간한 인기, 여전한 지프의 저력이다. 지금 줄 서면 내년이나 되어야 받을 수 있다는 의미다.

글래디에이터는 픽업이다. 픽업의 본고장 미국에서 왔으니 정통파라 할만하다. 지프의 첫 픽업은 아니다. 자료를 보니 63년, 68년식 글래디에이터 사진이 있다. 뿌리가 있다는 얘기다.

3.6ℓ 가솔린 엔진을 탑재한 글래디에이터 루비콘 트림을 시승했다.

덩치에 기가 눌린다. 5600(5725)x1935x1850(1990)mm 크기에 휠베이스는 3m를 넘어 3,490mm에 이른다. 온전한 하드탑 픽업은 해체 쇼를 하듯 지붕 떼고, 도어 떼고, 심지어 앞창까지 접어버릴 수 있다. 컨버터블 픽업으로 변신할 수 있는 것. 바로 이런 부분들이 피가 뜨거운 남자들의 애간장을 녹인다. 훌훌 벗고 거친 자연 속으로 달려가고픈 뭇 사내들의 로망인 거다.

픽업이라 짐도 잔뜩 싣고 움직일 수 있다. 이것저것 빠짐없이 다 싣고 산속으로 들어가는 호화로운 캠핑이 가능하겠다. 많은 장비를 싣고 산업 현장을 누비기에도 딱 좋다.

‘트럭베드’라 이름 붙인 적재함 공간을 제외하면 영락없는 랭글러다. 7슬럿 그릴로 대표되는 앞모습, 인테리어 등이 랭글러와 큰 차이 없다. 그대로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7인치 TFT 컬러 디스플레이로 계기판을 만들었고 4세대 유커넥트가 적용된 8.4인치 터치스크린이 센터페시아에 자리했다.

보디 측면에 강철 락 레일(Rock Rail)을 설치했다. 오프로드에서 먼저 장애물에 닿거나 충격을 받아 차체를 보호해 준다. 바이크의 라이딩 기어 같은 장치다.

짐을 싣게 되는 트럭베드는 세로 153cm, 가로 145cm, 높이 45cm 크기다. 트럭베드 내 좌우에 LED 라이트를 설치했고 각 모서리에 고정용 고리, 230V 파워 아웃렛을 배치했다. 짐을 싣고 고정하고 야간작업에 전원까지 끌어쓸 수 있는 공간이다. 트럭베드 안쪽에는 세 개의 트레일 레일과 레일 내 위치 조정 가능한 고리가 있다. 잡동사니 같은 짐들을 야무지게 고정할 수 있고, 스키, 스노보드, 심지어는 바이크까지 업을 수 있다.

트럭베드를 덮는 커버는 롤-업 소프트 토너 커버다. 차근차근 접어 고정할 수 있고, 펴면 화물 공간을 덮을 수 있다. 번거롭지 않아서 좋다. 손쉽게 접을 수 있다.

2열 시트 아래와 뒤편은 비밀 공간이 숨어 있다. 잠글 수 있는 수납공간이 그곳에 있다. 오픈 드라이빙을 해도 중요한 물건은 잠금장치가 있는 수납공간에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것. 시트 아래 있는 스토리지는 탈부착이 가능해 가방처럼 쓸 수도 있다. 그 비밀 공간에 보관된 블루투스 스피커는 깜짝 선물이다. 짱짱한 음질이 탁 트인 야외에서도 귀를 충분히 즐겁게 해준다.

엔진은 V6 3.6L 가솔린, 자연흡기 엔진이다. 다운사이징에 여념 없는 시대를 비웃듯 대배기량에 자연흡기를 고집하고 있다. 효율 연비는 모르겠고 자연흡기의 여유로운 파워를 만끽하겠다는 고집이다. 284마력. 배기량에 비해 초라한 힘은 하지만 충분히 강했다.

이 차 타고 고속질주 하는 건 바보짓이다. 온로드는 목적지로 가는 이동구간일 뿐이다. 글래디에이터가 찾아가는 목적지는 오프로드일 수밖에 없다. 이 차 타고 포장도로만 다니는 건 껍데기만 타고 즐기는 셈이다. 글래디에이터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진가는 오프로드에서 빛을 발한다. 자랑거리는 온통 오프로드 관련 기능들이다. 40.7도의 진입각, 18.4도의 램프각, 25.0도의 이탈각 및 250mm의 최저지상고, 최대 760mm 수중 도하, 2,721kg의 최대 견인력, 77.2:1 크롤비, 4:1 락-트랙 HD 풀타임 4WD 시스템, Dana M210 와이드 프론트 엑슬과 Dana M220 와이드 리어 엑슬 등등. 이런 탁월한 기능들을 어디서 누릴 것인가. 답은 분명하다. 오프로드다.

강원도 화천으로 무대를 옮겼다. 점 찍어놓았던 오프로드가 있어서다. 비포장도로지만 길이 분명한 곳은 그저 그랬다. 털털거리며 동네 마실 가듯 설렁설렁 움직인다. 사냥감을 못 찾은 사냥개의 심정이 이럴까. 길은 분명 오프로드지만 굳이 힘을 쓰지 않아도 길이 알아서 고개를 숙인다.

더 거칠고 힘든 길이 필요했다. 바위가 있고 개울물이 흐르는 친구의 농장으로 닥치고 공격. 비가 내린 뒤라 수량도 풍부하고 거친 바위도 곳곳에 포진해 있어 검투사의 투지가 살아나는 곳이다. 친구는 “거길 갈 수 있겠어?” 하는 마뜩잖은 눈으로 길을 열어줬다.

차체를 긁어대는 나뭇가지를 헤치고 가는 좁은 숲길 끝에 개울이 있다. 길이라면 못 갈 리가 없다. 길이 아닌 곳에서 지프의 길이 시작된다 했던가. 트랜스퍼를 4L에 넣고, 스웨이바를 분리했다. 스웨이바를 분리하면 서스펜션의 작동범위가 길어져 험로에서 훨씬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다.

개울에 진입을 시도했다. 경사진 차체는 지면, 바위에 닿을 듯 말 듯 개울가에 내려서고 바위가 널린 길을 차근차근 밟고 움직이고 다시 무사히 왔던 길을 되짚어 나왔다. 잠깐 헛바퀴를 돌 때는 트랜스퍼 앞뒤 락을 작동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밀고 나갔다. 탱크가 따로 없다.

휠베이스가 길면 경사로에 진입 탈출이 어렵다. 램프각이 확보되지 않아 배가 닿아버리면 움직일 수 없어서다. 글래디에이터는 최저지상고를 높여 이를 극복했다. 이 차의 최저지상고는 250mm. 어지간한 곳에서는 배가 닿지 않고 네 바퀴가 충분히 힘을 쓸 수 있는 조건이다. 또한 글래디에이터는 최대 760mm 깊이의 물길을 건널 수 있다.

오프로드에 최적화된 차지만 그렇다고 온로드에서 비실대는 건 아니다. 빠른 속도까지 치고 나갈 줄도 알고, 부드럽고 여유 있게 정속 주행할 땐 일반 SUV 부럽지 않은 주행 질감을 맛볼 수도 있다.

온로드에선 단순명쾌한 차다. 4H, 2H중 하나를 택하고 달리면 된다. 오프로드에선 가장 복잡한 차가 된다. 앞뒤 차축의 디퍼렌셜을 어디까지 잠글지, 스웨이바는 풀 것인지 말 것인지, 4L은 어디에서 선택할지 등등 주행상황과 노면 상태를 보고 운전자가 일일이 판단해야 한다. 여기에 트레일러까지 연결하면 선택해야 할 부분은 훨씬 더 많아진다. 하나하나 선택하고 조작하는 과정이 이 차를 타는 즐거움이다.

사각지대 모니터링, 후방교행 모니터링 시스템, 주차 보조 시스템 등을 갖췄다. 알파인과 제휴해 만든 프리미엄 오디오 시스템은 9개의 스피커를 통해 빵빵한 소리도 들려준다.

시속 100km에서 rpm은 8단 1,800, 3단 5,500 구간에서 움직인다. 3단까지 커버하는 게 대견하다. 주행보조 시스템으로는 크루즈컨트롤만 있다. 정속주행까지만 가능한 것. 어댑티브 크루즈컨트롤이 아니다. 차선이탈 방지장치는 없다. 아마도 글래디에이터에게는 사치품일 수도 있겠다.

서울에서 출발해 강원도 화천까지 120km를 움직이며 실주행 연비를 살펴봤다. 8.9km/L를 기록했다. 공인복합연비는 6.5km/L.

픽업트럭인지라 연간 자동차 세금은 2만8,500원에 불과하다. 등록 과정에서 개별 소비세와 교육세는 면제받고 취득세는 차 가격의 5%만 내면 된다. 아낀 돈으로 기름값 보충하면 되겠다.

판매가격 6,990만 원. 매력 있는 가격이다. 차를 살펴보던 친구가 가격을 보고 눈을 반짝였고, 공인복합 연비를 확인하더니 실망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오종훈의 단도직입
이 차에 다가서기를 망설이게 만드는 가장 큰 벽은 연비다. 리터당 6.5km의 연비는 아무래도 부담스럽다. 경제운전으로 120km를 달려 8.9km/L까지 끌어올릴 수 있었지만 이 역시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다. 공차중량 2,305kg의 무거운 차체, 대배기량에 자연흡기 엔진 등이 연비에는 그리 좋은 조건은 아니다.

덩치가 커서 공간이 좁은 곳에서는 불편하다. 널찍한 공간이 확보된 곳에서 타기가 좋다. 도시보다 시골에 어울리는 차다. 도시에 거주하는 이들에게는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겠다.

오종훈 yes@autodiary.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