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지루했다.


라스베가스에서 그랜드캐년을 찾아 가는 길. 대륙을 가로지르는 길은 곧게 뻗어 있었다. 한시간째 직진중. 오가는 차도 없다. 말로만 듣던 66번 도로를 달렸다. 미국 최초의 대륙횡단 도로다. 시카고에서 캘리포니아 싼타모니카까지 이어지는 말로만 듣던 ‘루트 66’.


첨단이랄 것도 없는 내비게이션이라는 기계 덕분에 난생처음 가보는 곳에서 겁도 없이 핸들을 잡을 수 있다. 게다가 내비게이션은 한국말을 할 줄 안다. 미국 서부에서 그랜드캐년을 갈 때 분기점 같은 곳 킹맨에서 내비게이션은 잠깐 헤맸다. 정확하게는 운전자가 길을 잘못 잡았고 내비게이션은 코스를 다시 계산했다.


길은 황량한 사막을 좌우로 나누며 쭉 뻗어 있었다. 앞에도, 뒤에도 차는 없었다. 가끔 세워진 제한속도 표시는 40마일, 때로 50마일. 50마일, 즉 시속 80km 정도다.


지루했다. 잠깐 눈이 풀리기도 한다. 차창을 열었다. 지루한 길은 앞으로도 뒤로로 곧게 뻗어 있었고 차는 그 가운데 한 점으로 달리고 있었다. 앞 뒤로 차는 없었고 한시간 전이나 큰 차이없는 풍경이 펼쳐졌다. 가속페달을 깊게 밟았다. 조금 빨리 달려서 이 지루한 시간을 일찍 마치고 싶었다.


마일로 표시된 속도계는 80을 넘겼고 100 근처를 넘나들었다. 시속 100마일, 160km다. 지루함이 사라지고 달리는 기분이 든다. 분명 다른 차는 없었다. 사막 한 가운데를 작은 차 하나가 점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시속 80~100마일의 속도로. 다른 차는 없었다. 분명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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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달렸을까. 안보이던 차 하나가 뒤로 붙었다.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픽업 트럭. 제법 달리는 군. 안전거리를 확보해줘야 하니 가속 페달을 조금 더 밟아 속도를 올렸다.그 순간 픽업 트럭 지붕 위로 경광등이 번쩍인다. 뭐야 저건. 순간적으로 머리에 떠오른 건 견인차? 먼지 잔뜩 뒤집어쓴 픽업 트럭이 설마 순찰차일지는 생각도 못했다. 잠깐 혼란스러운 머리 속을 정리하는 동안 경광등을 번쩍이던 그 차가 드디어 마지막 경고를 날린다. 싸이렌 소리를 울린 것. 픽업트럭 뒤로는 세단 순찰차가 한 대 더 따라 붙었다. 지루한 사막 풍경에 긴장감 넘치는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 앞뒤로 차는 없었는데.


차를 세웠다. 차창을 내리고 두 손은 핸들 위에 얌전히 올렸다. 조금 비굴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래도 최대한 선해 보이는 웃음을 웃었다. 잘못하면 총맞을지 모르는 순간이다. 한국에서처럼 차에서 먼저 내려 다가서거나 면허증 꺼낸다고 옷 안으로 손을 넣어선 안된다.

픽업에서 한명 , 세단에서 한명. 두명의 경찰이 차에서 내린다. 범죄자가 된 내 느낌은 뭐지? 경찰은 조수석 방향으로 다가 왔다. 차창을 열었다. “과속했으니 면허증 좀 보자”고 했다. 차에서 내려도 돼냐고 허락을 받은 뒤 차에서 내렸다. 여권과 국제면허증, 한국면허증을 모두 꺼내 보여줬다. 그냥 봐주지 머 그리 까탈스럽게 구는지. 하지만 입에서 나오는 말은 ‘아엠 쏘리’가 전부다. 한국 주소를 물어본다. 명함을 건냈다. 자존심은 상하지만 최대한 공손하고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장황한 설명이 이어진다. 넌 규정속도보다 19마일을 오버했다. 1마일당 5달러씩 95달러를 내야하는데 일단 법원에 전화를 걸고 벌금을 확정해야 한다. 그 뒤에 벌금을 내면 되는데 한국으로 고지서가 갈거다.이런 말과 함께 스티커를 발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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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비쌀 줄 몰랐다. 한국에서 온 여행자라잘 몰랐다. 이제부터 착하게 규정속도 지키며 잘 운전할테니 봐줄 수 없냐…말해봤지만 냉정한 답이 돌아올 뿐이다.


“널 바로 체포해 감옥에 넣을 수도 있다. 벌금도 최고 300달러까지 받을 수 있지만 그 정도로 한거다. 넌 이미 돈을 많이 아꼈다” 는 것이다.
체포, 감옥 하는 말을 듣는 순간 머리 끝이 쭈뼜 섰다. 물론 그냥 겁주려고 하는 말이겠지만 남의 동네를 여행하는 이방인을 겁주기엔 충분한 효과가 있었다. 95달러면..대충 10만원. 돈 내고 말지 뭐. 그런 생각을 하고 돌아섰다.


그때 뜬금없이 그 경찰이 묻는다. “그런데 어디가냐?”
“그랜드캐년간다 왜?”
“왜 여기로 왔냐. 먼길로 돌아왔구만. 저 앞에서 좌회전하고 오르막 내리막 어쩌고 저쩌고하면 그랜드 캐년이다. 잘가”
“알았다. 임마.” 친절한 척 하기는.


긴장의 순간은 95달러 짜리 과속딱지 한 장을 남기고 끝났다. 해당 법원에 전화를 걸어 벌금을 확정한 뒤 고지서를 발부받아 벌금을 납부해야하는 귀찮은 과정이 남았지만 그래도 경찰과의 유쾌하지 않은 만남이 끝나는 순간 안도의 한숨이 새 나온다. 감옥에 가지 않아도 되고 비싼 벌금 내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가 물밀 듯 밀려온다.
다시 운전석에 올랐다.


한시간쯤 정속주행했을까. 길은 여전히 지루했고 멀리 보이는 그랜드캐년의 웅장한 자태는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고 여전히 멀었다. 경찰과의 팽팽한 긴장이 지나간 사막 풍경이 다시 지루해진다. 밟을까 말까. 경찰은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었을까. 자꾸 사방을 둘러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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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종훈 yes@autodiary.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