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속 100km를 2초대에 끊는다. 3초대는 수두룩하고 4초대는 명함도 못 내민다. 고성능 전기차들이 등장하면서 성능 인플레이션이 한창이다.

최근 국내에 출시한 메르세데스 AMG EQS 53 4매틱은 3.8초에 시속 100km를 주파한다. 엊그제 발표한 현대 아이오닉5 N은 이보다 빠른 3.4초다. 테슬라 모델 S는 2.1초, 포르쉐 타이칸 터보 S는 2.8초다. 쟁쟁한 모델들의 성능 경쟁에 한국 차도 당당히 끼어있어 대견하다.

하지만 고성능 전기차가 왜 필요할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고성능은 본능이다. 더 강한 힘으로 더 빨리 달리고 싶은 본능. 전기차라고 예외는 아니다. 게다가 전기차에서 고성능은 더 쉬워졌다. 엔진 회전을 끌어올려 정밀하게 연료를 분사하고 배기가스를 재사용하고, 강한 토크를 견디는 변속기로 힘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많은 기술적 한계를 극복한 소수의 메이커만이 5초 미만의 100km/h 가속 시간을 구현할 수 있었다. 출력과 가속 시간은 기술 수준을 말해주는 척도였다. 엔진 시대에는 그랬다.

하지만 엔진이 사라지면서 이런 기술이 필요 없게 됐다. 전기 모터만으로 600마력, 700마력의 힘을 만들어낸다. 기술 장벽이 낮아져 더 쉽게 본능은 만족시킬 수 있다. 출력과 가속 시간으로 기술 수준을 자랑하는 시대는 엔진과 함께 사라지고 있다.

기아 EV6 GT 광고가 이를 잘 말해준다. EV6 GT가 드래그레이스에서 쟁쟁한 슈퍼카들을 따돌린다는 광고. EV6 GT가 대단한 성능을 갖췄음을 보여주는 획기적인 광고다. 하지만 상대가 모두 내연기관 자동차였다. 전기차가 그만큼 유리한 위치라는 의미다. 내연기관 자동차를 따돌릴만한 고성능을, 전기차는 쉽게 만들 수 있음을 이 광고가 보여주고 있다.

전기차는 본능과 반대로 달려야 하는 차다. 150년 가까이 쌓아 올린 엔진의 시대를 걷어내고 전기차로 교체하는 건, 본능을 뛰어넘은 이성의 판단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전기차를 타는가? 국가는 왜 보조금을 줘가며 전기차 보급에 열을 올릴까? 2016년 파리협정 체제 이후 각국은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정했는데 한국은 2030년까지 2018년 총배출량 대비 40% 감축하고 2050년까지 탄소 중립을 달성한다는 계획이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 전기자동차가 꼭 필요한 것이다. 유럽에서는 2035년부터 내연기관 자동차 판매를 금지하기로 합의했다. 합성연료를 사용하는 경우 허용한다는 예외를 뒀지만, 내연기관 퇴출이라는 큰 방향은 되돌릴 수 없는 흐름이다.

고성능을 제대로 누릴 공간도 없다. 한국에서는 시속 110km, 독일을 제외한 유럽에서는 시속 130km가 법이 허용한 최고 속도다. 갈수록 촘촘히 단속 카메라를 배치하고 있어서 잠깐이라도 단속을 피해 달릴 수 있는 곳도 이제는 거의 없다. 500마력에 제로백 2초면 뭐하나? 달릴 곳이 없는데.

힘 자랑하는 전기차를 보면 M60 기관총을 한 손에 든 람보를 도심 한가운데서 만난 느낌이다. 베트남전쟁은 벌써 끝났음을 람보에게 전해주고 싶다. 그리고 고성능 전기차에 한 마디 전한다.

그렇게 빨리 어디로 가시나? 속도도 좋지만, 방향도 생각하시라.

오종훈 yes@autodiary.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