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를 개발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처음부터 시장의 폭발적인 환영을 받고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승승장구하는 차를 보는 것은 당연히 즐거운 일이다.

혼자 그 차를 개발한 것은 아니지만 왠지 뭔가 해냈다는 마음으로 뿌듯하다. 하지만 그 반대인 경우도 있다. 그 중 특히 기억에 남는 차가 있다.

지금도 기억이 나는 것이 본사에서 남양연구소에 출장을 가려면 자기 차를 가지고 가거나, 아니면 총무 팀에 미리 신청해서 업무용 차를 배차받아 이용하곤 했다. 직원들이 배차를 꺼리는 차가 두 모델 있었다.

연구소로 가면서 동승한 직원들끼리 “엔진소리 듣고 현재 속도를 가늠할 수 있는가?” 하는 농담을 하곤 했다. 엔진소리로 현재 주행속도를 도저히 가늠하기가 어려운 차가 두 모델이었는데 경차인 아토스와 소형 MPV로 불리던 라비타였다. “엔진소리는 100㎞, 실제 속도는 60㎞”.

남양까지 출장가는 과천~의왕,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그야말로 엔진이 부서져라 밟아야 하는 비선호 차들이었다.

1999년부터 2001년까지 현대자동차는 전통적으로 개발해오던 승용차와는 다른 새로운 차종들을 많이 내놓기 시작했다. 현대차 최초의 미니밴인 트라제XG, 최초의 승용형 SUV인 싼타페, 그리고 최초의 유럽전략형 모델인 소형 MPV인 라비타 등이다.

지금도 인터넷 등에서 자료를 검색해보면 라비타에 대해 많은 평가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시대를 앞서간 비운의 차였다’라 든가, ‘국내에서는 실패했지만 해외에서는 나름의 성공을 한 차’라든가, 조금 심하게 말해 ‘나오지 말아야 했던 차‘라든가 하는 말들이다.

국내에서는 초기판매분을 제외하고 판매실적을 논하기 어려울 만큼 희귀한 차였지만 전략 목표였던 유럽 시장을 중심으로 라이프 싸이클 동안 30만대 이상을 판매해 나름 체면치레를 했다. 유럽공장 건설 및 시장진출에 적합한 차가 없던 현대자동차에 나름대로 마케팅 목표에 입각해 개발한 차였다는 데 의의가 있었다.

라비타의 디자인 특성이나 당시 소비자 평가 등에 대해서는 생략하고 라비타가 국내에서 그렇게 힘겹게 판매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던 배경 등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프로젝트명 FC, 이전 현대차의 프로젝트 코드 규칙에 대해 지식이 조금 있는 분들은 이 코드를 보면 이 차의 차급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코드 뒷자리가 차급) 최소한 이 차가 어떤 차급을 목표로 했었는지 추정은 가능할 것이다.

현대차의 베스트셀러인 아반떼의 그 당시 프로젝트 코드가 XD, 아랫급 소형인 베르나(엑센트)의 코드가 LC였으니 FC인 라비타는 베르나급인 소형이었을 것이다. 소형이면 소형이지 소형이었을 것이라는 건 또 무슨 이야기인가?

라비타는 현대차가 본격적인 유럽판매에 필요한 전략차종으로 개발했다. 예나 지금이나 유럽 시장은 소형차가 주종을 이루는 시장으로 그 당시에도 유럽 전략차종으로는 소형차가 당연한 것이었다.

당시 유럽 시장에는 1995년 르노에서 내놓은 준중형급 승용차 메간이 시장에 나왔고 메간의 MPV 모델인 시닉이 1996년 추가되어 대박이 나고 있었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부르는 자동차의 분류에 대해 한번 돌아보자. 요즘은 싼타페 같은 차를 ‘지프’ 또는 ‘찦차’라고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대부분 자연스레 SUV라는 명칭을 자연스레 사용하고 있다.

SUV, Sports Utility Vehicle이라는 명칭과 싼타페가 무슨 연관이 있을까? 솔직히 이야기하면 이 분류는 자동차 메이커 마음대로 사용하면 그만이다. 국내 시장에서 ‘찦차’라고 불리던 차를 SUV라고 부르게 된 과정에는 나의 죄(?)도 일부분 차지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몇 년 전인가 BMW가 X시리즈 출시 초기에 ‘새로운 콘셉트의 MAV’니 하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MAV, Multi Activity Vehicle이란다. 후에 SAV(Sports Activity Vehicle) 표기하기도 했다.

이걸 보고 무슨 차인지 연상이 되나? 대략 다양한 용도, 혹은 스포츠 활동에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인 건 알겠는데 아마 BMW 마케팅 담당에게 물어보면 이렇게 이야기할 것 같다. “그냥 뭔가 다른 회사와는 다르면서 새로워 보이게 하려고 그랬다” 하고 말이다.

다시 시닉으로 돌아가서 그러면 MPV는? 아마 국내 소비자에게 물으면 이렇게 대답할는지도 모르겠다. “그거 미니밴 말하는 거 아니요?” 하고 말이다. 그러면 시닉은 미니밴, 즉 소형 미니밴이었다는 이야기인가?

그 콘셉트로 개발한 라비타도 소형 미니밴? 뭐라고 해도 좋다. 그렇다면 그 당시 국내 시장의 소비자에게 한번 물어보자. 미니밴이 뭐냐고 말이다.

“트라제나 카렌스 같은 차 말하는 거 아니요!”하고 대답하지 않았을까?

그럼 그 양반들에게, 아니 그 당시 국내 시장에서 미니밴의 정의는? 아마 삼박자가 맞는 것이 미니밴이었을 것이다. 7인승(이상), LPG, 연간 자동차세 65,000원. 이 세 박자 말이다. 2,000년 초 그야말로 없어서 못 팔던 MPV(사실은 SUV도), 우리가 미니밴이라고 부르던 차의 정의다.

이런 시장 상황에 라비타를 내놓으면서 현대차가 제시한 콘셉트는 “복합기능형(Cross Over) 소형 미니밴”이었다. 아마 MPV는 그 당시 국내 시장에 조금 생소한 명칭이라 유사한 표현인 Cross Over를 사용했으리라.

5인승, 가솔린 엔진, 소형차 그대로인 자동차세. (어떤 글에서는 이것을 3단 콤보라고 하기도 하더라)

무엇이 미니밴이라는 말인가? 하고 소비자들은 생각했을 것이다. 아마 그 당시 영업 현장에 있었던 분들이 이글을 본다면 손사래를 치지 않을까? 소형차급이라고 하지만 가격은 소형차가 아니니 베르나급의 소형차 소비층에게 차량의 다목적성을 아무리 설명한들 먹혀들어가지 않고, 미니밴 소비층에게는 그야말로 계란으로 바위 치기로 판매가 어려워 현대차 창사 이래 신차가 나오자마자 업무용 차는 전부 라비타로 바꾸고 영업 현장에서는 판매개시와 동시에 특별판촉에 들어갔다. (마케팅에서는 오죽 시달렸으면 차를 어항으로 만들어서 금붕어를 키울 생각까지 했겠는가?)

이런 최악의 3단콤보뿐 아니라 차량의 기본적인 성능도 문제였다.

유럽 수출을 전제로 개발해 수동변속기와 1.5 가솔린 엔진의 조합을 최적으로 세팅했지만 내수는 자동변속기가 기본이다 보니 출력이 부족했다. 특히 여름에 에어컨을 켠다거나 오르막이 큰 산악 도로 등에서는 더욱 문제였다. 힘이 달려서 가속페달을 밟다 보니 연비는 저 아래로 내려가고.

물론 라비타에는 수출지역 등을 고려해 1.5 가솔린뿐 아니라 1.6 가솔린, 1.8 가솔린에 1.5 디젤엔진까지 다양한 엔진 라인업을 구성했다. 1.6 가솔린과 1.8 가솔린은 국내 자동차 세제상 1,600cc 배기량으로 인해 자동차 세금이 중형차급으로 적용받아 경제성이 떨어져 소비자의 선호가 떨어질 것이고. 1.5 디젤을 고려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겠지만 내수에서 승용차에 디젤엔진 적용이 가능해진 것은 2005년부터이니 당시로선 그림의 떡이고….

결국 동력성능 문제로 도대체 무슨 차의 플랫폼을 베이스로 차를 만들었기에 차가 이렇게 무겁냐 하는 것이 프로젝트 회의의 단골 메뉴였다. (프로젝트 코드상으로는 베르나 플랫폼일 텐데 중량은 아반떼를 넘나드니 연구소는 해명하기 바빴을 것이다)

심지어는 내수에 1.5 가솔린 엔진 말고 1.8 가솔린 엔진만 판매하자는 황당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고. (결국 2005년 페이스리프트시 오죽했으면 세제상의 불이익을 알면서도 엔진을 1.6 가솔린으로 바꿨으니 거의 판매를 포기하겠다는 수준이었다)

연구소에 시승을 가면 1.5 가솔린 모델에 수동변속기 모델만 준비해주거나 1.8 가솔린 모델을 준비해줬다. 마지못해 준비해준 1.5 가솔린 자동변속기 모델을 시승해보면 말할 것도 없이 입을 모아 상품성 없다고 난리였고.

이런 상품성에 이탈리아의 피닌파리나가 디자인하면 어떻고 피닌파리나 로고를 차에 부착한들 차가 팔리겠는가 (이 로고도 차 한 대당 얼마의 로열티를 따로 받았다는….)

그러던 와중에 런칭을 얼마 앞두고 최고경영층에 신차개발의 전반적인 진행 상황을 보고하는 보고회가 남양연구소에서 있었다. 시승회도 물론 포함해서.

다음날 연구소에 연락해보니 회장님이 “차가 아주 잘 나간다”고 칭찬을 하셨다는 것이다. 회장님 시승차는 힘이 좋았다고?

유재형 <자동차 칼럼니스트>

필자 유재형은 1985년 현대자동차에 입사, 중대형 승용차 상품기획을 맡았으며 현대모비스 전신인 현대정공에서 갤로퍼, 싼타모 등의 개발에 참여했다. 이후 현대자동차로 옮겨 싼타페, 투싼 등 SUV 상품개발과 마케팅을 거쳐 현대자동차 국내상품팀장을 끝으로 퇴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