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다 파일럿. 큰 덩치에 담대한 모습이다. 화려한 기교보다 기본에 충실한 디자인이다. 간간이 크롬 라인이 강조된 모습은 오히려 서민적이다. 미국 중산층의 감성이 묻어있다. 혼다를 대표하는 SUV로 미국에서 생산돼 태평양을 건너와 국내에서 판매된다.

5,005×1,995×1, 7,995mm에 휠베이스 2,820mm로 3열 시트까지 갖춘 7인승 대형 SUV다. 공간은 양극화됐다. 1, 2열은 넓고 3열은 상대적으로 좁다. 2열을 좌우 분리형 독립 시트인 이른바 캡틴 시트로 구성해 공간을 더 넓게 사용했다. 공간 그 자체가 주는 고급스러움을 만끽할 수 있다. 대신 3인용 시트로 구성한 3열은 좌우로 좁다. 하지만 2열 시트를 앞으로 밀면 3열도 최소한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

큰 차의 넓은 공간을 만끽할 수 있다. 1열에는 기어 레버 대신 변속 버튼을 사용해 공간을 더 넓게 활용할 수 있다. 2열에는 센터 터널이 없다. 바닥이 평평해 안 그래도 넓은 공간이 더 넓어졌다. 합리적이고 실용적이다.

2열에서는 천정에 모니터, 무선 헤드폰 등으로 엔터테인먼트 시스템을 누릴 수 있다. 블루레이 디스크에 HDMI 단자까지 갖춰 음악 비디오 게임 등을 즐길 수 있다. 목적지까지 빨리 가는 방법은 단순한 시간 문제만이 아니다. 이동 시간이 즐겁고 재미있다면 조금 천천히 가도 시간은 빨리 흐른다. 엔터테인먼트가 중요한 이유다.

캐빈 토크는 기내 방송 같다. 운전석에서 마이크로 2, 3열 승객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멀리 있어 소리치지 않아도 정확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큰 차를 누리는 소소한 재미다.

스티어링 휠은 3.2회전 한다. 세 바퀴를 돌고도 남는 락투락 조향비는 이 차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 큰 덩치를 편안하게 다룰 수 있게 해준다. 오프로드에서도 여유 있는 조향비는 안정적으로 차를 다룰 수 있게 해준다.

2021년형으로 변하면서 추가된 러닝보드 덕에 승하차가 한결 편하다. 발을 딛고 실내로 편하게 드나들 수 있다.

실내는 조용했다. 어쿠스틱 글래스와 액티브 노이즈 캔슬레이션을 적용했고 엔진도 조용해 시속 90km 전후의 속도에서도 이렇다 할 소음이 없다. 여럿이 타고 편안하게 움직일 수 있는 대형 SUV의 면모를 높은 수준에서 완성하고 있다.

고성능을 품은 무난함. 파워트레인의 특성이 그렇다. V6 3.5L 가솔린 직분사 엔진에 9단 자동변속기를 사용해 284마력의 출력을 확보했다. 다운사이징을 무시한, 요즘 드문 대배기량 엔진이다. 배기량에 비해 출력이 강한 것은 아니지만 필요하다면 제법 거친 힘을 드러낼 줄도 안다. S 모드에서 킥다운을 걸면 사나운 엔진 사운드를 토해내며 전력 질주에 나선다.

가속은 자연스럽고 변속의 느낌은 확실하게 살아있다. D 모드에서는 패들을 통한 수동 변속이 큰 의미가 없다. 시프트 다운이 걸렸다가도 금세 풀린다. 따박따박 변속하는 좀 더 강한 변속감은 S 모드에서 살아난다.

강한 힘으로 속도를 높이는 고속주행에서 차체 안정감은 흔들리지 않는다. 상시 사륜구동 시스템, 잘 세팅된 서스펜션, 20인치 타이어가 안정감 있게 고속주행까지 받쳐준다. 사륜구동 시스템은 전륜 기반이다. 정속주행을 할 때는 잠시 앞바퀴만 구를 때도 있다.
엔진도 그렇다. 엔진에 걸리는 부하가 작을 때에는 6기통 중 3개 실린더만 작동한다. 가변 실린더 제어시스템이다.

혼다 센싱이 전후좌우를 커버해준다. 어댑티브 크루즈컨트롤, 차선이탈 방지, 도로이탈 경감, 후측방 경보, 크로스 트래픽 모니터, 멀티앵글 후방 카메라 등으로 구성된 혼다 센싱은 운전자가 미처 챙기지 못하는 부분을 놓치지 않고 챙긴다. 조향에 개입해 차선을 벗어나지 않게 움직이고, 앞차와의 거리도 스스로 조절해낸다. 높은 수준의 반자율 운전 능력을 갖췄다. 그래도 아직은 ‘보조’ 시스템이다. 운전은 아직 운전자가 최종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 차에 모든 걸 맡겨선 안 된다.

지능형 관리 시스템을 통해 노멀 스노 머드 샌드 4개 주행 모드를 택할 수 있다. 에코 모드는 별도 버튼으로 어떤 주행모드에서도 선택 가능하다.

시속 100km, 9단에서 rpm은 1300, 3단에서는 5800까지 커버한다. 힘차게, 혹은 여유롭게 상황에 맞춰 다뤄주면 충실하게 반응한다. 가속페달을 완전히 밟아 속도를 높이면 힘찬 엔진 사운드를 앞세워 호쾌한 질주를 시작한다. 고속에서도 불안감이 크지 않다. 사륜구동의 안정감에 차체의 무게감이 더해진 묵직한 주행 질감을 느낄 수 있다.

코너링도 재미있다. 차체가 높아 불리하지만 사륜구동 시스템이 어느 정도 보완해 무리 없이 코너링을 마무리했다. 살짝 기우는 차체, 중립적인 조향 반응이 인상적이다. 고속주행, 공격적인 코너링, 급제동 등 운전자가 원하면 파일럿은 적극 대응하며 기대를 충족시키는 반응을 보여준다.

하지만 파일럿은 차분하게 움직일 때가 가장 좋다. 7인승 대형 SUV에 고속질주나 공격적인 코너링은 어울리지 않는다. 편안하게 조용한 실내를 즐기며 움직이는 게 이 차에는 가장 잘 어울린다. 물론 원한다면

GPS 계측기를 장착해 시속 100km 가속 시간과 거리를 10회에 걸쳐 반복 측정했다. 가장 빠른 기록은 8.21초, 126.16m였고 평균 기록은 8.46초 130.26m였다. 공인 복합 연비는 8.4km/L. 파주-서울간 55km를 직접 달리며 적극적인 경제 운전을 통해 측정한 실주행 연비는 12.7km/L였다.

넓은 공간을 가진 무난한 대형 SUV다. 획기적인 변화보다 잔잔한 재미가 있다. 공간 그 자체가 주는 고급스러움, 기내 방송 기분을 내며 수다를 떨 수 있는 캐빈 토크, 뒷좌석에서의 엔터테인먼트로 소소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사륜구동 시스템이 있어 조금 더 깊은 자연의 품에 한 발 가까이 들어설 수도 있겠다. 패밀리카로 딱 좋은 이유다.

비즈니스용으로도 좋겠다. VIP를 2열 캡틴 시트에 모시고 뒷좌석 모니터에 파워포인트를 띄워놓고 이동 중에 프레젠테이션을 할 수도 있겠다. 빠듯한 시간에 쫓기며 조금 빨리 공항으로 달려가기에도 파일럿이라면 편하겠다. 비즈니스에 열정적인 가정적인 아빠에겐 안성맞춤 아닐까.

오종훈의 단도직입

풋 브레이크 방식의 주차 브레이크는 위치가 어중간하다. 높이 떠 있어 조작할 때 왼발을 높이 들어야 한다. 풋 레스트 공간에 왼발을 올려놓으면 주차 브레이크 페달이 정강이에 닿을락 말락 거슬린다. 위치를 낮춰 편하게 조작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음성인식 시스템은 보완이 필요해 보인다. 라디오 주파수, 내비게이션 등의 명령이 제대로 먹히지 않는다. 음성명령 버튼보다 터치스크린 모니터로 조작하는 게 스트레스 안 받는 길이다.

오종훈 yes@autodiary.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