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세단의 안락함에 스포츠카를 따돌릴 기세. 호화로운 인테리어까지 가진 SUV. 랜드로버 2020년형 레인지로버다. 아주 다양한 면모를 레인지로버 안에서 만나게 된다.

영국을 대표하는 럭셔리 SUV다. SUV는 원래 고급스러움과는 상극이다. 진흙탕을 누비고 바위를 오르고 강물을 건너는데 고급지게 차를 만들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랜드로버가 역발상으로 고급 SUV 레인지로버를 만들어 처음 세상에 내놓은 게 1970년 6월. 정확하게 50주년을 맞는 시기에 만나는 의미 있는 차다.

사냥을 갈 때도 격식을 따지고 복장을 갖추는 이들이 있듯, 어떤 상황에서도 고급스러움을 요구하는 이들은 있게 마련이다. 이들의 선택은 레인지로버일 수밖에 없었다. 오랜 기간 레인지로버는 ‘사막의 롤스로이스’로 불리며 전성기를 구가한다. 컬리넌이 나오면서 이 별명은 의미가 퇴색했지만, 여전히 대표적인 럭셔리 SUV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디젤, 가솔린, 보그, 오토바이오그래피, SVA, LWB, SWB 등으로 구성된 7개 트림이 국내 시판 중이다. 시승차는 레인지로버 5.0 SC 오토바이오그래피 LWB 모델을 시승했다. 판매가격 2억4,427만 원.

에어서스펜션을 사용해 주행 상황에 따라 차 높이가 조절된다. 타고 내릴 때, 시속 105km를 넘어서면 15mm 낮아진다. 트렁크에 짐을 실을 땐 뒷 서스펜션을 50mm 낮출 수 있다. 오프로드에선 최대 75mm까지 높일 수 있다. 오프로드에서 최대 수심 900mm까지 도강할 수 있다.

서스펜션은 기본적으로 단단하지만, 노면 충격을 어느 정도 품어 안으며 불쾌한 반응을 줄인다. 편안하고 고급스럽다.

브리티시 럭셔리의 정수를 드러내는 호화로운 실내는 승객을 압도한다. 센터페시아에는 버튼을 싹 치우고 10인치 스크린 두 개를 배치했다. 터치 프로 듀오다. 스크린 터치로 대부분 기능을 확인하고 선택하고 조작할 수 있다.

원목과 가죽으로 만든 스티어링 휠은 손이 먼저 고급스러움을 알아챈다. 시트는 물론 대시보드까지 가죽으로 마감했다. 센터 콘솔에는 보냉 기능이 있어 음료수를 차갑게 보관할 수 있다.

뒷좌석에서 누리는 호사는 기대 이상이다. 전동 시트를 180도 가까이 누일 수 있고, 별도 모니터를 통해 다양한 엔터테인먼트를 즐길 수 있다. 19개의 스피커를 사용하는 메르디앙 서라운드 시스템 덕에 귀도 호강한다.

움직임이 묵직하다. 무거움과는 결이 다르다. 함대를 이끄는 플래그십답다. 5,200×1,985×1,840mm, 휠베이스 3,120mm 크기에 어울리는 동작이다. 늘 그런 건 아니다. 가속페달을 깊게 밟으면 2.6t의 몸무게가 로켓처럼 달린다. 과녁으로 쏜 화살처럼 빠르다. 고속주행에서도 흔들림과 바람 소리가 크지 않다. 에어로 다이내믹과는 거리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디자인이지만, 속도에 비해 풍절음이 낮다. 체감속도가 낮아 조금 더 깊게 페달을 밟게 된다.

사륜구동 시스템, 초당 500회 도로를 모니터링하며 서스펜션을 아우르는 어댑티브 다이내믹스, 275/45R21 사이즈의 타이어가 차체를 잘 받쳐준다.

시속 100km에서 급제동을 했다. 급제동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여유 있게 멈춘다. 앞이 숙여지는가 싶더니 곧 안정을 되찾으며 제동을 마무리한다.

코너에서는 평소보다 조금 더 빠르게 돌아나갈 수 있었다. 차체가 조금 기우는 느낌을 숨길 수는 없지만 불안하지 않다.

4개의 오프로드 모드를 포함해 모두 7개의 주행모드가 있다. 오프로드에서는 저단 기어, 즉 4L에 해당하는 로 기어를 사용할 수 있다. 정통 SUV의 피를 간직하고 있다는 증거다. 전자식 센터 디퍼렌셜은 앞뒤로 5:5로 토크를 배분한다.


레이더 기반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은 앞차를 따라 완전 정지까지 구현한다. 스티어링 어시스트 기능도 있어 반자율 운전이 가능하다. 최대 200km/h의 속도까지 조향 간섭한다는 설명이다. 차선이 감지되지 않는 경우에는 30km/h 미만의 속도에서 전방 차량을 따라 경로를 설정한다.

능숙한 운전자처럼 반자율 운전을 구현한다. 차간 거리를 유지하고 차선을 밟지 않고 차로 중앙을 유지한다. 편안하게, 그리고 안전하게 움직일 수 있다.

GPS 계측기를 이용해 시속 100km 가속 테스트를 했다. 급가속했지만 헛바퀴 도는 일 없이 힘차게 출발했다. 대체로 육중한 느낌이지만, 그래프를 보면 초반부터 강한 구동력으로 움직이는 것을 알 수 있다.

메이커가 밝히는 0-100km/h 가속 시간은 5.5초. 평균 기록에서 크게 이탈한 한 차례의 기록을 제외하고 모두 7차례 측정한 결과 가장 빠른 기록은 6.22초, 평균 기록은 6.48초였다.

0-100km 가속 거리는 72.08m가 가장 짧았다. 평균 기록은 90.26m. 100m도 채 안 달려 시속 100km에 도달했다.

파주-서울간 55km를 달리며 측정해본 실주행 연비는 9.34km/L였다. 공인 복합 연비는 5.6km/L. 올 알루미늄 차체를 적용해 경량화했지만 공차중량이 2,680kg에 달할 만큼 무거운 편이다.

SUV지만 다양한 장르를 만날 수 있다. 호화로운 고급 세단의 인테리어를 누릴 수 있고, 스포츠카를 추월할만한 고성능도 만날 수 있다. SUV로서 누리는 탁월한 공간과 기능은 기본이다. 무엇보다 큰 매력은 브리티시 럭셔리의 정수를 담은 영국의 대표적인 SUV라는 사실이다.

오종훈의 단도직입

연비는 아쉽다. 차를 거저 줘도 운영하기 힘들 정도다. 리터당 5.6km를 달리는 공인 복합연비는 부담스럽다. 55km 구간을 경제 운전으로 달려도 두 자릿수 연비가 안된다. 물론 이런 부담을 아무렇지 않게 감당하는 부자들이 이 차의 고객이니 그들에게는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겠다.

운전석과 조수석의 팔 받침대는 없어도 좋겠다. 자연스럽게 센터 콘솔 커버에 팔을 걸치게 된다. 별도의 받침대가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

뒷좌석에 돌출된 모니터는 호화로움을 강조하기에는 좋겠지만 안전에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 노출된 모니터는 신체와 부딪힐 위험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오종훈 yes@autodiary.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