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 만에 풀체인지한 랭글러를 만난 건 강원도 평창의 골짜기에서다. 물이 흐르는 계곡을 헤쳐나온 랭글러가 카메라 앞에 멈춰섰다.

SUV라고는 하지만, 랭글러는 조금 특별하다. SUV의 뿌리다. 2차대전 중에 태어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지프가 랭글러로 이어진다. 한국에선, SUV라고 부르기 이전에 ‘지프형 자동차’로 불렀다. 랭글러는 지프의 대표 모델이다.

신차 발표를 겸한 시승회 장소로 산속 계곡을 택한 건 랭글러니까 가능한 일이다. 시승 코스는 오로지 오프로드만으로 구성됐다. 이동 구간에 시멘트 도로를 잠깐 탔을 뿐 온로드는 아예 넣지를 않았다. 오프로드를 위해 태어난 차의 넘치는 자신감이다.

4개 트림이 있다. 랭글러 스포츠, 랭글러 루비콘, 루비콘 하이, 그리고 사하라다. 이중 루비콘이 좀 더 오프로드에 특화됐다. 루빅콘에는 스웨이바가 적용됐고 타이어도 아예 오프로드용 머드 타이어가 제공된다.

랭글러는 체격부터가 오프로드에 최적화됐다. 76cm 깊이의 물길을 아무 문제 없이 건널 수 있다. 최저 지상고 269mm. 26cm 높이의 장애물은 그냥 ‘바퀴 사이로’ 집어넣을 수 있을 정도. 접근각 36도, 이탈각 31.4도, 램프각 20.8도여서 차를 타고 만날 수 있는 오프로드라면 그냥 넘어설 수 있는 체격이다. 살짝 걸릴 수도 있을텐데, 눈 감고 꾹 가속 페달을 밟으면 넘어갈 수 있다. 살짝 스크레치 나는 건, 훈장처럼 달고 다녀도 좋겠다. 조금 찌그러진 차체가 더 멋있어 보이는 게 이 차, 랭글러의 장점이다.

원형 헤드램프와 사각 테일램프다. 원형 램프 사이에 세븐 슬롯 그릴이 있다. 범퍼 위로 사람이 올라설 수 있을 정도다.

센터페시아 아래에 자리한 두 개의 변속 레버가 이 차의 정체성을 말해준다. 2H와 4H, 그리고 4L을 갖춘 사륜구동 시스템. 루비콘에는 락 트랙 HD 풀타임 4×4시스템을, 사하라에는 셀렉트랙 풀타임 4×4 시스템을 적용했다. 락트랙은 4대1, 셀렉트랙은 2.7대1까지 기어비가 낮아진다. 기어비, 액슬기어비, 트랜스퍼 기어비, 최종감속비 등을 계산해 최종 계산되는 크롤비는 77대1에 이른다. 그만큼 ‘천천히 잘 기어 올라갈 수 있다’는 말이다.

숲속으로 난 길을 타고 올랐다. 거친 길을 따라 뒤뚱뒤뚱 올라가는 기분이 마치 야생마를 타고 초원을 어슬렁거리는 기분. 차가 심하게 요동을 치지만 노면에서 전해지는 충격의 상당 부분을 걸러낸다. 바위를 밟고 올라서는 순간 차는 상하좌우로 심하게 비틀어지는 모양이 되지만 실내에서 느끼는 기울기는 그리 심하지 않다. 타이어와 서스펜션이 비틀어진 차체의 수평을 유지하려 안간힘을 쓰는 것.

오르막, 내리막 거침이 없다. 오르막에선 4H, 1, 2단 기어의 강한 구동력을 바탕으로 순식간에 오르고, 내리막에선 내리막길 주행보조 장치의 도움으로 가속 페달 밟지 않고 서행할 수 있다.

바위들이 깔린 계곡은 길이 아니다. 자연 그대로의 계곡. 랭글러는 뚜벅뚜벅 밀고 나간다. 가속 페달에서 발을 떼고 클리핑 주행으로 계곡을 헤쳐나갈 수 있었다. 정통 오프로더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4L이다. 이를 택하면 타이어에 끈끈이가 끈적끈적 새어나오는 기분이다. 물러설줄 모른다.

랭글러의 가장 큰 장점은 오프로드에 익숙하지 않은 운전자도 노련하게 오프로드를 공략할 수 있게 해준다는 사실이다. 변속 레버와 부변속기만 제대로 선택하면, 나머지는 뚜벅뚜벅 차가 밀고 나간다.

타이어가 중요하다. 사하라에는 온로드 타이어, 루비콘엔 머드 타이어를 끼웠다. 머드 타이어는 온로드에서 소음과 진동이 크지만, 오프로드 전용모델의 이미지를 키우기 위해서다. 이를 감수하고 오프로드에 최적화한 상품구성을 택한 것. 얘도 좋고 재도 좋은, 양다리 걸친 게 아니다. 그냥 얘 하나만 좋은거다. 오프로드에 목숨 건 셈. 타이어가 이를 말한다. 255/75R 17 사이즈의 오프로드용 머드 타이어다. 편평비 75 시리즈. 영락없는 오프로더임을 말해주는 숫자다.

2.0 리터로 작아진 가솔린 엔진은 272마력의 힘을 낸다. 최대토크는 40.8kgm. 기존 3.6리터 엔진보다 배기량은 줄었고, 출력은 낮아졌지만 토크는 더 세졌다. 오프로드에서 힘 걱정할 일은 없다. 오프로드에선 엔진 파워는 그리 중요치 않아서다. 변속기와 사륜구동 시스템, 타이어가 오프로드에선 더 쓰임새가 크다.

시승 코스는 짧았다. 하지만 랭글러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험할수록 랭글러는 신이 난다. 세상모르고 제멋에 취해 사는 녀석이다. 친환경 자동차로 세상은 바삐 돌아가지만, 랭글러는 산속으로 달려가 자연에 더 가까이 간다는 의미의 ‘친환경’은 자신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천상 마초다.

볼트 4개를 풀면 앞창을 누일 수 있다. 지붕도 뜯어낼 수 있고, 문짝 4개도 떼어낼수 있다. 완전 야전형으로 탈바꿈 할 수 있는 것. 사람 미치게 만드는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 것.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지프다. 지프를 품은 크라이슬러를, 전쟁에 패한 이탈리아의 피아트가 인수했다. 2차대전 패전국이 지프를 가져간 셈이니, 누가 이긴건가? 그렇게 돌고 도는 세상이다.

가격은 조금 올랐다. 11년만에 출시하는 새모델이라 그럴 수 있겠다 생각이 든다. 가장 낮은 트림인 랭글러 스포츠가 4,940만원이다. 오프로드에 최적화된 루비콘은 5,740만원, 가죽시트 등 조금 더 고급인 루비콘 하이는 5,840만원이다. 오프로드에 더해 온로드 주행까지 고려한 랭글러 사하라는 6,140만원이다.

오프로드에서만 시승했다. 다음엔 온로드에서 만났으면 한다. 오프로드에서 심장 터질듯한 짜릿한 즐거움을 맛볼 수 있지만, 현실에선 그런 오프로드를 만나기 쉽지 않다. 생의 90% 이상을 온로드에서 지내야 하는 게 모든 SUV의 현실. 최강 오프로더 랭글러의 운명도 다르지 않다.

오종훈의 단도직입
글로브박스는 무척 좁다. 너비가 한뼘이 채 안될 정도다. 물건을 수납하기도 궁색한 넓이여서 제대로된 수납공간이라고 하기엔 궁색하다. 차라리 센터콘솔이 훨씬 넓어 편하다.
지프는 이 차가 풀타임 4×4라고 소개하고 있다. 4×4 오토 모드가 있어서 항상 사륜구동상태, 즉 상시사륜구동-풀타임4×4로 달릴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파트타임 4×4다. 2H가 있어서다. 이 상태에선 사륜구동 아닌 두바퀴굴림상태가 된다. 즉 상시사륜상태를 벗어날 때도 있어서 풀타임 4×4라고 얘기할 수 없다. 풀타임이 반드시 우수한 것도 아닌만큼 억지로 이를 강조할 필요는 없겠다.

오종훈 yes@autodiary.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