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집안의 존재감 떨어지는 아이. 1등을 밥 먹듯 하는 형제 그늘에 가려 기죽은 청소년 시절을 보낸 경험이 있다면 동감할 터다. 체로키가 그렇다. 랭글러, 그랜드 체로키 등 쟁쟁한 모델의 그늘에 가려 체로키의 존재감은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흐르는 피를 속일 수는 없는 법. 집을 벗어나면 평균 이상의 강한 존재감이 드러난다. 남 보기에 좋은 집안은 그렇게 멍애이자 날개가 된다. 시승 모델은 지프 뉴 체로키 2.4 론치튜드 하이 트림이다.

5세대의 부분변경 모델이다. 경도의 뜻을 담은 ‘론지튜드’는 가솔린 트림에 붙인 이름. 디젤 엔진 모델은 하반기에나 들여올 것으로 보인다.

지프 가문의 상징, 7 슬롯 그릴을 이 차도 가졌다. 지프 배지를 단 슬림한 앞모습, 정통 SUV의 비례를 가진 옆모습. 세련된 뒷모습을 가졌다. 앞창엔 유머가 숨어있다. 윈드실드 좌측 아래 모서리에 오리지널 지프의 실루엣을 그려 넣은 것. 얼핏 시선을 돌리다 만나는 그 모습에 미소를 짓게 된다.

센터페시아에 매립한 유커넥트 8.4 터치 스크린은 이 차의 컨트롤 박스다. 대부분의 편의 장비들을 이 모니터를 통해 조작한다. 열선 시트 버튼도 따로 없다. 터치스크린으로 조작해야 한다. 굳이 힘들여 꾹꾹 누르지 않아도 된다. 슬쩍 터치하면 예민하게 알아듣고 반응한다.

확실하게 한글화한 음성명령시스템은 온도조절까지 한다. “온도를 20도로 설정”하고 말하면 그렇게 세팅한다. 전화, 오디오 등을 음성명령으로 조작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더 정확하고 편해졌다.

나파 가죽을 적용한 버킷 타입 시트는 운전자의 몸을 잘 지지해 준다. 꽉 잡아주는 건 아니지만 필요할 때 지지해 주는 효과가 커서 흔들거림이 큰 오프로드에서 유용했다.

원형으로 배치된 셀렉터 레인 기어 레버는 주행모드를 오토, 스노, 스포츠, 샌드&머드로 구분해 선택한다. 샌드&머드가 오프로드용 주행모드다.

풀타임 사륜구동이다. 이륜구동, 로 모드, 디퍼렌셜 록 등을 따로 선택할 수 없다. 그냥 도로 상태에 따라 주행모드를 택하면 끝이다. 그래도 오프로드에서 강한 구동력을 맛볼 수 있다. 오프로드 주행에 익숙하지 않은 운전자에게는 이처럼 단순한 사륜구동 시스템이 더 좋을 수 있다. 이것저것 고민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경사진 사면 언덕에 45도로 차를 걸쳐 뒷바퀴 하나를 공중에 띄웠다. 언덕 경사각은 컸지만 차의 경사각은 그만큼 크지 않아 수평에 가깝게 유지했다. 멀티링크 서스펜션이 큰 경사각을 많이 완화시킨 덕이다. 그 상태에서 아무 문제 없이 부드럽게 대각선 스턱을 빠져나왔다. 사륜구동의 기본기다.

랭글러가 정통 SUV라면 체로키는 도심형 SUV다. 도심형이라고 무늬만 SUV인 나약한 차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다른 브랜드의 오프로드 형 SUV와 비교해 뒤지지 않을 만큼 강한 면모를 가졌다. 그래도 이차, 지프 가문의 체로키 아닌가.

뒷좌석은 172cm의 기자가 꽉 차게 앉을 수 있는 공간이다. 느슨하게 기대앉으면 무릎 앞이 좁아지고, 허리를 세워 똑바로 앉으면 머리가 좁아진다.

파워트레인은 2.4ℓ 가솔린 엔진에 9단 변속기 조합이다. 최고출력 177마력, 최대토크 23.4kgm, 공차중량 1,830kg, 복합연비 9.2km/L다. 론지튜드는 4,490만 원, 론지튜드 하이는 4,790만 원이다.

움직임이 경쾌하다. 세단보다 드라이빙 포지션이 높다. 운전석에 앉으면 푹 파묻힌 느낌이다.
노면 굴곡을 타고 넘을 때 약간의 진동이 온다. 흔들림이 세단보다 크다. 당연한 얘기지만 세단의 안정감에는 못 미친다. 대신 시트가 높아 멀리 볼 수 있다. 탁 트인 시야는 심리적 안정감에도 보탬이 된다.

얻으면 잃는 것. 자동차의 진리다. 연비를 높이면 성능이 떨어지고, 고속주행안정성을 높이면 저속 승차감을 손해 볼 수도 있다. 연비와 성능, 승차감, 가격, 고급감 등의 요소 사이에서 묘수를 찾아 궁리를 거듭하는 게 엔지니어들의 숙명.

그런 차원에서 9단 변속기를 볼 수 있겠다. 고단 변속기로 성능과 연비를 동시에 만족시키려는 시도다. 고단의 부드럽고 기름 덜 먹는 변속과 저단의 강한 구동력을 변속기 하나로 구현할 수 있는 것. 연비와 성능을 함께 잡을 수 있는 장치라 할 만하다. 물론 경량화와 소형화가 관건이다.

패들 시프트는 핸들 아래로 숨은 부분이 없다. 눈에 보이는 게 전부다. 이를 작동하려면 손을 조금 위로 올려 핸들을 쥐어야 한다.

9단변속기가 조율하는 엔진은 차분하게 움직인다. 화낼 줄 모르는 선한 사람처럼 엔진 반응이다. 잔잔하다. 차가 멈추면 시동도 꺼진다. 엔진스톱 시스템 덕이다. 그렇게 악착같이 연료를 아껴 연비 9.2km/L를 보인다. 5등급이다.

시속 100km에서 rpm은 9단 1,200에서 3단 5,200 구간에서 움직인다. 폭넓게 변속기어를 활용할 수 있는 것. 낮은 단수로 힘있게 달리거나 높은 기어로 편안하게 움직이거나 운전자의 마음에 달렸다.

가속페달은 저항하지 않는다. 킥다운 버튼 없이 끝까지 한 번에 밟힌다. 순발력 있게 터지는 힘은 아니지만, 힘을 끌어모아 가속을 이어간다. SUV로선 충분한 힘이다. 체로키에게 고속주행은 큰 의미 없다. SUV여서다. 일상보다 조금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한 차다. SUV에서 스포츠카만큼의 고속주행을 바란다면 과욕이다.

고속주행 구간에 이르면 엔진은 고회전으로 치고 올라가는 데 힘을 쥐어짜는 느낌이다. 못 달리는 건 아니지만 자연스럽지가 않다. SUV로써 대견하다 싶은 속도까지 달려가지만, 굳이 그럴 필요 있나 싶다. 미친 듯 질주하고 싶다면 SUV에서 내려 스포츠카로 갈아타는 게 맞다.

체감 속도와 실제 속도의 차이는 거의 없다. 달리는 만큼 느껴지는 속도다. 힘을 쓰면 쓰는 만큼 엔진 사운드도 올라간다. 속도가 빨라지면서 뒤로 휘몰아치는 바람소리가 고속에선 크게 들린다.

일반 승용차보다 조금 더 흔들린다. 실내는 조용하지 않다. 승용차에 비하면 그렇다. 이런 부분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체로키를 탈 수 있다. 대신 체로키가 주는 선물은 오프로드다. 승용차에선 꿈도 꾸지 못하는 오프로드에서의 탁월한 성능을 만날 수 있다.

지프 가문 최강의 오프로더는 물론 랭글러다. 그랜드 체로키도 체로키보다는 한 수 위다. 집안에선 넘버3쯤 되겠지만 집 밖의 다른 차들과 비교한다면 체로키 역시 탁월한 오프로더다.

셀렉터리언 기어로 주행모드를 선택하는데, 오프로드에서는 샌드/머드를 택해야 한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게다가 풀타임 사륜구동시스템이다. 운전자는 그냥 샌드/머드를 택하고 오프로드를 달려야 한다. 사륜을 해제하고 이륜으로 달리거나, 거친 길에서 로 기어를 택하거나, 디퍼렌셜을 잠그거나 할 필요가 없다. 그런 기능이 아예 없다. 운전자로선 까다롭지않게 다룰 수 있는 단순한 사륜구동차다.

사륜구동차를 타면 탄탄대로를 버리고 샛길을 기웃거리는 버릇이 생긴다. 가보지 않은 길을, 그 길이 조금 거칠더라도 용기를 내서 들어가 보게 된다. 그런 맛에 사륜구동차를 탄다.

일상적인 시승 구간에서 벗어나 오프로드에 진입했다. 샌드/머드 모드를 택했다. 알피엠이 조금 더 올라간다. 노면에서 올라오는 자잘한 소리들이 커진다. 그 소리를 해치고 차는 뚜벅뚜벅 믿음직한 발걸음을 옮긴다. 사륜구동차가 오프로드에서 강한 건 어느 한쪽 바퀴가 구동력을 잃어버려도 75%의 구동력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두 바퀴에 문제가 생겨도 50%의 힘을 쓸 수 있다. 두바퀴굴림차는 한쪽 바퀴가 빠지면 당장 50%의 힘만 남는다. 어찌해볼 도리가 없게되는 것.

물기가 많은 미끄러운 진흙길은 탄력으로 지났다. 자잘한 자갈이 깔린 흙길, 풀들이 깔린 초지 등을 가뿐히 헤치고 나갔다. 그런 길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과 함께 더 큰 기쁨은 자연의 품 안으로 한 발짝 더 들어가서 만나는 풍경이다. 승용차를 타고서는 절대 만날 수 없는….

랭글러가 없는 길도 만들어서 가는 오프로더라고 한다면, 체로키는 적어도 그곳에 길이 있다면 움직일 수 있는 SUV라 하겠다. 그래도 오프로드 주행할 땐 단독주행은 피하는 게 좋다. 적어도 2대가 짝을 이뤄 움직이는 게 안전을 위해서 바람직하다.

타이어는 225/60R 17 미쉐린 타이어를 쓰고 있다. 편평비 60 시리즈 타이어다. 사이드월이 높다. 오프로드까지 감안한 타이어다. 과격한 코너링을 할 땐 낭창거린다. 온로드에선 부드럽고 조용하게 움직이고, 오프로드에선 거친 충격을 서스펜션과 함께 흡수할 수 있는 사이즈의 타이어다. 타이트한 코너에서는 차가 많이 기우는 느낌이다. 차체가 높아 코너에서 과하게 몰아붙이기엔 부담스럽다. 보수적인 코너링이 이 차엔 어울린다.

지프 체로키는 성능과 상품성이 딱 좋은 수준에서 세팅됐다. 도심에서 편하게 움직이고, 오프로드에서는 적어도 그곳에 길이 있다면 거침없이 움직일 수 있는 성능을 가졌다. 온·오프로 들을 잘 계산해 만든 차다. 살펴볼수록 합리적인 아메리칸 SUV다.

오종훈의 단도직입
크루즈컨트롤 관련한 버튼이 3개로 흩어져 있다. 스피드 리미터, 크루즈컨트롤, 어댑티브 크루즈컨트롤 버튼이 핸들 오른쪽에 제각각 따로 배치됐다. 어찌어찌 만지다 보면 작동하기는 하지만 자꾸 두세 번 손이 가게 된다. 직관적인 조작과는 거리가 멀다. 3개의 버튼은 통폐합해서 재배치하는 게 좋겠다.

오종훈 yes@autodiary.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