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자동차 산업에 또 하나의 자동차가 탄생했다. 거창하게 첫 문장을 시작한 것은 지금부터 얘기할 차가 그만큼 의미있는 차여서다. 레이. 기아자동차가 새로 만들어낸 박스형 자동차다. 한국에는 그동안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형태의 차다. 쏘울을 만들어내면서 한차례 기분 좋은 쇼크를 전했던 기아차가 다시 레이로 소비자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바다 건너 제주도에서 막 출시한 따끈한 경차 레이를 만났다.

경차다. 배기량 1,000cc, 길이 3600mm, 너비 1,600mm 높이 2,000mm가 법에서 정한 경차의 규격. 이 범위 안에 들어와야 경차로 인정받을 수 있다. 레이는 3,595 x 1,595 x 1,700mm로 높이만 제외하고 경차 규격을 꽉 채우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작은 차 경차를 상품성 있게 만들기 위해선 마지노선까지 활용해 정해진 규격 안에서 최대한의 사이즈를 추구할 수밖에 없다. 눈길을 끄는 건 높이다. 차 높이 1,700mm로 성인 남자의 키와 비슷하다. 실내 높이는 1,330mm를 넘는다. 껑충한 스타일. 과거 현대차의 아토즈가 톨보이 스타일을 추구했지만 레이가 아토즈와 비슷하다고 보기는 힘들다. 좀더 완벽한 박스카의 모습을 갖췄기 때문이다. 아토스보다 닛산 큐브와 닮았다.

이 차의 가장 큰 특징은 조수석 B 필러가 없다는 것. 그동안 한국 차에 이런 차는 없었다. 한국 최초다. 하지만 물 건너 바깥에는 있다. 토요타 dB오픈데크에 B 필러가 없다. 벤츠의 대형 쿠페 CL63 AMG도 B 필러를 생략하고 있다. 닛산 큐브에서 박스카의 아이디어를, dB 등에서 B 필러리스를 각각 차용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차용을 했건 아니건 큰 의미는 없다. 최초가 아니면 나중에 나오는 존재는 늘 최초의 그늘에 가리게 된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최초의 가치가 큰 것이다. 분명한 건 어쨌든 한국 최초라는 것. 기아가 아닌 다른 브랜드들은 차용할 생각조차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레이는 실내 공간이 차 크기보다 엄청 넓다. 박스카인데다 차의 앞 뒤를 가르는 경계선인 B필러가 없어서다. 어른은 실내에서 일어설 수 없다. 하지만 130cm 미만인 아이들은 다르다. 마음껏 일어서도 된다. 그 또래의 아이들을 가진 부모 입장에선 혹 할만한 매력포인트다. 하지만 명심해야 한다. 달리는 차에서 일어서서 까불면 위험하다. 넓은 공간의 역효과도 생각해야 하는 것. 차가 움직일 땐 안전띠를 매고 시트에 얌전히 앉는 버릇을 들여야 한다. 조수석 안전띠는 시트에 부착된 상태다. B 필러가 없어 안전띠를 지지할 곳이 없어서다.

튼튼한 도어는 마음에 든다. 경차지만 철판 울리는 소리가 통통 나는 깡통 도어가 아니다. 중형세단 못지않은 묵직한 느낌이 인상적이다.

경차라고 하는데 사양과 옵션은 호화롭다. 경차에 과분한 장치들이 도처에 깔렸다. 버튼식 스마트키, VDC도 아닌 그보다 한 단계 더 발전한 형태인 VSM, 6개의 에어백, 2열 열선시트, 운전석 전동식 허리 지지대, 열선 스티어링 휠 등을 갖췄다. 이쯤이면 호화 경차라 할만하다. 럭셔리 경차다. 이런 호화 옵션들 없어도 누가 뭐라하지 않을텐데 굳이 끼워넣은 이유가 궁금하다. 짚이는 게 있긴 하다. 차 값을 올리려면 그만한 구색을 갖춰야 하는 것. 결국 호화옵션의 비싼 경차로 만들어진 것이다.

시승차에는 카파 1.0 리터 엔진이 올라갔다. 출력은 78마력. 토크는 9.6kg.m다. 단촐한 성능의 이 엔진은 17.0km/L의 연비를 확보했다. 가솔린과 LPG를 함께 사용할 수 있는 바이퓨얼 엔진도 있다.

제한된 규격 안에 꽉차게 만든 차다. 그래서 디자인 역량이 개입하기 힘든 차다. 사이즈가 먼저고 디자인은 그에 따라 가는 것. 레이를 보면서 예쁘다, 혹은 잘된 디자인이라는 생각이 안드는 이유다. 보닛이 살짝 튀어나오고 뒤는 지붕에서 범퍼까지 절벽으로 떨어지는 1.5박스 스타일. 조금 억지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그래도 제한된 틀 안에서 디자인의 멋을 만들어 냈다. 뭉툭한 범퍼는 무뚝뚝해 보인다. 라디에이터 그릴 주변은 기아의 패밀리룩이 어김없이 적용됐다. 뒷모습에서 나름대로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휠 하우스와 범퍼 주변의 라인이 좋은 예다. 시각적으로 무게 중심을 낮추는 디자인이다. 세로로 배치한 테일 램프, 상하로 열리는 테일 게이트, LED 램프 등이 눈길을 끈다.

운전석에 앉으면 시원하고 편하다. 일단 앉는 자세가 편하다. 차가 높아 그냥 의자에 앉듯이 자연스럽고 편한 운전자세가 된다. 차창이 넓고 시원해 시야가 탁 트인 점도 마음에 든다. 2열 시트 좌우측 창은 약 80% 정도만 열린다. 4단 자동변속기를 적용했는데 변속레버가 손에 쏙 잡힌다. 느낌이 좋다.

선명한 화면을 갖춘 7인치 내비게이션은 음성인식 기능까지 갖췄다. “FM 107.7”하고 말하면 신기하게도 그 주파수의 라디오 방송을 찾아준다. “MBC”하고 말하면 MP3라고 반응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정확하게 인식했다.

공간 활용성은 국내 최고 수준이다. 머리 위 수납공간, 글로브 박스 위의 오픈 트레이, 뒤좌석 바닥의 수납공간 등 손이 닿는 곳마다 수납공간이다. 시트는 다양하게 접어서 화물을 실을 수 있다. 자전거도 접지 않고 넣을 수 있을 정도다. 실용성은 최고다.

78마력의 엔진은 공차중량 998kg의 차체를 끌고가는데 크게 부족함이 없다. 버튼을 눌러 시동을 걸면 1,000rpm에 조금 못미친다. 엔진 소리는 정직하게 들리고 공회전 상태에서 약간의 흔들림도 있다. 당연한 일이다. 1.0 리터 엔진을 얹은 경차가 시동을 걸고도 적막강산 수준의 정숙함을 갖췄다면 그게 이상한 거다.

가속은 힘들지 않다. 시속 100km까지는 무리없이 가속한다. 그 이상 속도를 올리면 가속감은 조금 늦어진다. 150km/h를 맞추기가 쉽지는 않다. 120km/h를 넘기면 바람소리와 엔진소리가 비슷한 수준으로 거칠게 들어온다. 시속 120km로 달리는 데 체감 속도는 중형세단의 160km/h 정도다. 소리가 앞서 달리고 차체는 뒤를 따라가는 형세다.

4단 자동변속기의 느낌도 나쁘지 않다. 변속충격은 쉽게 알 수 있지만 엔진 파워를 흘리지 않고 잘 단속했다. 서스편션은 조금 거칠다. 충격을 치고 나간 뒤 마지막 순간이 쇼크도 제법 있고 잔진동도 이어진다.

핸들은 약 3.4 회전한다. 많이 돌아가는 편이다. 코너에서 급하게 핸들을 조작하면 순간적으로 언더스티어링이 느껴지지만 곧 정상 궤도를 되찾는다. 차고가 높아 코너에서 많이 불안할 것 같았지만 생각보다는 안정됐다.

경차다. 그래서 어지간한 문제는 다 용서된다. 경차라는 사실이 기대수준을 크게 낮춰놓기 때문이다. 성능이 조금 떨어져도, 조금 시끄러워도, 경차니까 그러려니 한다. 경차의 장점이다.

어찌보면 레이는 모순덩어리다. 경차지만 경차에 굳이 필요 없어보이는 호화로운 옵션과 편의장치를 갖췄다. 그래서 가격도 비싸다. 경차답지 않은 가격이다. 경차지만 굳이 경차에 구애받지 않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레이는 엔진과 구동계통은 경차 수준, 나머지 부분은 차급에 걸맞지 않는 고급차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물었다. 일부 옵션을 빼서 가격을 더 낮출 모델을 내놓을 생각은 없는지. 기아측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장담하진 못한다. 시장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충분히 검토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오종훈의 단도직입가격이 아쉽다. 이 차의 판매가격은 1,240만원부터 1,625만원까지다. 가장 싼 쏘울이 1,355만원부터다. 레이 상급 모델과 쏘울 아랫급 모델이 역전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이쯤되면 경차라고 해야할지 의심스럽다. 경차를 앞세워 성능의 부족함을 이해받으면서 가격은 전혀 경차 답지 않다. B 필러리스의 안전성은 공인기관의 검증을 속히 받을 필요가 있다. 기아측은 차에서 가장 중요한 기둥 중 하나인 B 필러를 없애면서 충분히 보강을 했다고 하지만 소비자 입장에선 그래도 미심쩍은 게 사실이다. 기아차의 설명이 사실이고 확실하게 믿을 수 있음을 자동차성능시험연구소 같은 곳에서 정확한 충돌테스트 결과로 검증해줘야 한다. 많은 사람들, 특히 서민들이 많이 사게 될 경차니까 더더욱 확실한 검증이 필요하다.

오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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